중시조 시중공 휘 탁
* 中祖 諱 琢 주요 관직) 副使(정5품), 提學(정3품), 知省事(종2품), 大提學(정2품), 정당문학(종2품), 문하시랑평장사(정2품), 都僉議門下侍中(도첨의문하시중,종1품, 현 부총리) 중조께서는 가락국 金首路王을 始祖로 하고 삼한공신 흥무대왕 김유신을 中始祖로 하는 遠孫이시다. 중조의 妃(비)는 진위이(振威李)씨로 찬성사(贊成事,정2품) 이항(李恒)의 자녀이다. 이항은 太子太保(정1품)를 지낸 李方의 후손이다. 중조의 대표 관직은 공민왕 때 都僉議門下侍中(도첨의문하시중,종1품, 현 부총리) 직이다. 당시 시중은 3시중(시중, 좌시중, 우시중)으로 분류되었고 조선시대로 비유하면 삼정승에 해당된다. 중조께서는 충혜왕 2년 지공거(知貢擧:학사로서 과거를 집행하는 사람) 이제현을 座主로 하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급제 후 병부, 탁 중시조의 자는 여화(汝華) 호는 신암(愼庵)이며 병부상서(정2품)를 지낸 김세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려 28대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재임 시까지 4대에 걸쳐 도첨의문화시중(종1품)을 역임하였다고 전한다.
중조의 아들인 至珍公의 字는 의경(義卿)이고 號는 국보(國寶)이다. 公은 익제(益齊) 李齊賢과 양파(陽坡) 洪彦搏이 공거(貢擧)로 하는 문과에, 목은 이색 등과 함께 과거에 응시하여 兵科로도 발탁되어 左正言知製敎(정3품)에까지 제배(除拜) 되었다. 父의 낙향 시기에 맞게 관직을 사임하고 세거지에서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 하는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한다.
조선조 개국 太祖조에 司甕令(사옹령,정3품) 오르게 되었고 훗날 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에 추증된 내용이 영조 갑술보(1754년 발행)에 기록되고 있다. 슬하에 천해공(千海公)과 천수공(千秀公)이 있으며 千海公은 평동면 용곡 복룡산하로, 千秀公은 경상도 울주(울산)로 낙향하여 이후 세손들이 각각 터를 잡게 되었다. 낙향 후에도 조선 초에 조정으로부터 수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향지에서 후진 양성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잦은 戰禍로 문중의 문헌은 소실되었고 나주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은 전남 각 지방은 물론 전국 각지로 확산 되어 정착하게 되었다. 고려말기 원나라의 간섭과 倭의 도발, 홍건적의 침입 등 외세의 침입이 잦은 상태에서 권문세족은 外的으로는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附元(부원: 원나라에 의존)하였고 內的으로는 불법적 수탈과 매관매직을 자행하여 왕권을 약화시키는 상황에서, 중조를 비롯한 당시 과거를 통하여 새롭게 등장한 신흥 사대부 집단은 座主와 문생의 관계로 성리학을 수용하고 이들 권문세족을 견제하는데 앞장선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개혁정책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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