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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를 찾아서(Ⅰ)

  

悲戀(비련)의 故鄕(고향) 侍郞(시랑)골

1. 몰락해가는 고려와 侍中公(시중공) 할아버지의 선택

 할아버지 주변이 참혹하게 몰락되고 이성계의 추종세력들은 날로발호하니, 琢(탁)자 할아버지의 마지막 선택은 登廳(등청)에 뜻을 접고 낙향길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고향 경기도 양주 땅에 내려가시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고 經書(경서)를 구하다가 후생 강학에만 전념하시면서 세월을 보내시었다. 그때가 1389년 창왕 재임 기간이었다.

2. 조선국 개창과 할아버지

 1392년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조선국을 개창하기에 이르니, 고려국 수절신인 琢(탁)자 할아버지는 기약 없는 둔적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엔 없었다.

 가솔을 거느리고 떠나오시어 정착하신 곳, 그곳이 오늘의 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2구 낭동골이다.

3. 시랑골의 역사

 시랑골은 金侍郞(김시랑)琢(탁), 梁侍郞(양시랑)棟材(양동재)가 찾아들어 세 가를 이룬 곳이다. 그곳은 한 시대를 함께 살던 이웃들이 지칭한 지명으로, 시랑골 또는 낭동골이다.

 시랑골은 인구의 증가로 나주목 시랑면으로 발전했다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이웃 水多竹浦面(수다죽포면)과 侍郞面(시랑면)을 통합하여 多侍面(다시면)이 되었으며, 낭동골은 근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웃 마을과 합쳐서 복암2구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터를 잡았던 그곳 자연부락은 예나 다름없이 낭동 또는 시랑골이라 불리고 있다.

4. 시랑골에 오시게 된 할아버지

 고려 수절신들은 우리 琢(탁)자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혁명정부에 가담을 거부하고 두문동 72현이 되거나 지리산 등 심산유곡 인적이 드문 곳으로 遁迹(둔적)해 갔었다.

 시랑골은 수도 개경(개성)에서 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 곳이며, 인적이 드문 골짝이다.

 고려 시랑을 함께 지내시고 최영 장군 휘하에서 함께 하셨던 제주양씨 무력공파 후손인 梁棟材(양동재)가 이미 낙향해 있었고, 할아버지 동생들 일부가 시랑골 강 건너 낭주(지금의 영암 구림)땅 골짜기에 숨어 살고 계셨다.

5. 시랑골에서의 삶

 우리는 이 나라 유일의 갑족이요 고려국 명문가의 후예인데, 비록 고려국이 망했을지라도, 아니 둔적의 운명에 처한 길손이었을지라도 품격을 잃지 않았기에, 할아버지가 정착해 사신 곳을 시랑골, 할아버지가 산책하시던 산을 시랑산이라 한 시대를 함께 살던 사람들이 새 지명을 탄생시킬만큼 존망의 대상으로 살아왔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勢(세)를 잡고 城(성) 밖에 사는 회진임씨(나주임씨)들의 無禮(무례)와 跋扈(발호)를 警戒(경계)해왔으며, 자손들의 혼사도 금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존심에서였다.

 지금 백제성이라고 거론하고 있는 城(성)은 회진임씨의 무례와 발호를 경계하기 위하여 우리가 쌓은 城(성)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6. 悲戀(비련)의 고향으로 변해버린 시랑골

 우리는 侍郞(시랑)골에서 약 200여년을 세 가를 크게 이루며 살아왔건만, 불행하게도 7년의 임진왜란은 비련의 고향으로 변모시키고 말았다.

 바로 앞이 회진포. 왜군의 살육행위와 노략질이 오죽했으리. 더욱이 7세손 효량 할아버지의 사위인 金千鎰(김천일) 장군이 의병 600명을 거의 처갓집 남자들로 규합하여 출전했고, 남은 가족들은 금성산 등지로 피신하는 등 풍비박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가옥은 불타버리고, 조상의 묘소와 비석까지 잃어버리고, 살아남은 자는 살길을 찾아 흩어져갔다.

 성씨, 본관, 파조를 잃어버린 사람도 많다.

 아무튼 琢(탁)자 할아버지의 후예로서, 시랑골은 잊을 수 없는 곳이며 비련의 옛 고향이기도 하며 정신적 시온(Zion)땅이 되기도 한다.